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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쇼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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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 쇼세이는 대만 출신의 일본 프로 야구 선수로, 외야수와 투수로 활약했다. 가이 농림학교 시절 고시엔에 여러 번 출전했으며, 1937년 도쿄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인간 기관차'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942년과 1943년 수위 타자 타이틀을 연이어 획득하고 MVP를 수상했으며, 1944년에는 도루왕을 차지했다. 한신 타이거스와 마이니치 오리온스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갔으며, 1946년에는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기도 했다. 일본 프로 야구 최초로 20시즌을 뛰었으며, 1995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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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쇼세이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52년 7월
본명이시이 마사유키 (石井 昌征)
출생 이름고 하 (吳波)
출생1916년 6월 28일
사망1987년 6월 7일 (향년 70세)
출생지타이완 다이난 주 난시코 지청 시롱구 (현재 가오슝시 차오터우구)
사망 장소알 수 없음
신장167cm
체중64kg
던지는 팔좌투
치는 타석좌타
수비 위치외야수, 투수
선수 경력
프로 입단 연도1937년
첫 출장1937년 3월 28일
최종 출장1957년 10월 19일
경력다이난 주립 가기 농림 학교
도쿄 거인군 (1937-1943)
한신군/오사카 타이거스 (1944, 1946-1949)
마이니치 오리온스 (1950-1957)
수상 및 기록
일본 야구 리그 MVP1943년
노히트 노런1946년 6월 16일
통계 (선수)
타율0.272
안타1,326
타점389
도루381
통계 (투수)
승패 기록15승 7패
평균 자책점3.48
탈삼진66
명예의 전당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1995년 (특별 위원회)
타이완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2018년

2. 선수 경력

고 쇼세이는 뛰어난 운동 신경과 빠른 발을 바탕으로 '인간 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으며 일본 프로 야구 초창기를 풍미한 선수였다.

가이 농림학교 시절 곤도 효타로 감독의 지휘 아래 봄 고시엔에 1회, 여름 고시엔에 3회 출전하여 맨발로 플레이를 펼치며 이름을 알렸다. 당시 외야수와 투수를 겸했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해 야수에 전념했다.

1937년 도쿄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가진 외야수로 활약하며 '인간 기관차'라고 불렸다.[26] 1942년1943년 2년 연속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당시 품질이 투박한 날지 않는 공을 사용했기 때문에 타율은 각각 .286과 .300으로 낮았다. (1942년 타율 0.286은 역대 수위 타자 최저 기록이다.)

1943년 시즌 종료 후 대만으로 귀환하며 자이언츠를 탈퇴했으나, 오사카 지역 기업인 가미시마 화학 사장의 소개로 1944년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했다. 이 이적에는 현금이 사용되기도 하였다.[26] 1944년 시즌에 20경기에 출장하여 19도루를 기록, 고 신교와 함께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1946년에는 투수가 부족했던 팀 사정으로 인해 투수로도 등판했다. "외야에서 정확한 홈 송구를 할 수 있으니까 투수도 가능할 것이다"라는 이유였다. 같은 해 4월 28일 한큐 브레이브스 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첫 선발로 나서 9이닝 1실점으로 프로 첫 승을 완투승으로 장식했다. 이후 선발 로테이션에 정착, 같은 해 6월 16일에는 투수 겸임으로 전후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이 경기에서 사사구 5개를 내주었으나 투구수는 122개, 경기 시간은 약 1시간 30분 정도였다. 같은 해 팀 내 최다인 14승(6패), 리그 9위의 방어율 3.02를 기록했다. 등판이 없는 날에는 1번·중견수로 나서 타율 0.291(리그 14위)를 기록하는 등 투타에서 맹활약했다.

1946년 이후에는 투수로 출전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주로 1번 타자로 한신 구단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다.

1949년2리그 분열 소동으로 퍼시픽 리그마이니치 오리온스로 이적해 1957년 은퇴했다.[26] 프로 생활 20년 만에 현역에서 은퇴했는데, 실제로 20시즌을 치른 것은 고 쇼세이가 최초였다.

1987년 6월 7일 향년 70세로 사망했다. 1995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요미우리와 한신이라는 인기 팀의 주력 선수로 활약했던 드문 존재였다. 요미우리 대 한신의 OB전에서는 가와카미 데쓰하루, 아오타 노보루후지무라 후미오, 가지오카 다다요시 양 팀에서 "너는 여기 선수야"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일본 프로 야구는 전쟁의 영향으로 시즌이 중단되었다. 한신 고시엔 구장의 그라운드가 감자밭이 되었을 때, 고 쇼세이는 그곳에서 현장 감독(경작 지도원)을 맡았다. 고 쇼세이는 학창 시절 농림학교에서 배운 경험을 살려 토양 개량에 종사했다.

2. 1. 프로 입단 전 (자이 농림학교 시절)

t=吳波중국어는 심상 소학교 시절 높이뛰기에서 좋은 기록을 내어 오다 미키오로부터 와세다 대학으로 오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기도 했다.[3]

가이 농림학교(후의 국립 자이 대학) 시절 곤도 헤이타로 감독 아래 봄 고시엔에 1회(1935년), 여름 고시엔에 3회(1933년, 1935년, 1936년) 출전했다.[4] 맨발의 선수로 알려졌지만, 평소에 맨발로 플레이한 것은 아니었고, 고시엔 출전 전에 모두 스파이크를 새로 장만했지만, 고는 발에 맞지 않아 물집이 생겨 아파서 벗어 던졌을 뿐이었다고 한다.[5]

당시 외야수투수를 겸임했지만, 1935년 봄 고시엔 2회전에서 릴리프로 등판, 다른 구원 투수 2명과 합쳐 총 21개의 볼넷을 내주는 난조로 우라와 중에 12점을 주고 패했다. 이후 주전 투수가 되는 일은 없어 야수에 전념하게 되었다.[6] 1935년 여름 고시엔 준준결승에서 마쓰야마 상업에 연장전 끝에 패했지만, 이 경기에서 안타를 쳐서 1루에 출루하자마자 3구 연속으로 도루를 성공시켜 불과 3구 사이에 득점을 올렸다. 또한 혹서의 여름 고시엔에서 플레이하면서 이 당시 신문에 "고시엔은 시원했다"라는 담화를 남겼다.[7] 고시엔 통산 6경기에서 19타수 4안타, 타율 .211.[8]

2. 2.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 (1937~1943)

1937년 도쿄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가진 외야수로 활약하며 '인간 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었다.[26] 자이언츠 최초의 동양인 외국인 타자였다.[26] 신인임에도 1번·중견수 레귤러가 되어 춘계에는 타율.289를 기록하여 타격 성적 5위에 오르는 동시에, 리그 최다인 83루타를 기록했다.[9] 이후 타격 부진으로 출장 기회가 줄었으나, 1940년부터 하위 타순이지만 중견수 레귤러로 다시 활약했다.

1942년에는 주로 7번 타자를 맡았지만, 당시 품질이 조악한 날지 않는 을 사용했기 때문에 다른 선수들이 모두 저타율에 고전하는 가운데, 고는 전년보다 타율을 크게 향상시켜 0.286으로 수위 타자를 획득했다. 이는 역대 최저 수위 타자 기록이다. 이 해 리그 최다 득점 (65득점)을 기록하는 동시에, 도루 2위 (40 도루)를 기록했다.

다음 해인 1943년에는 '오파'에서 '고 쇼세이'로 개명하고, 시즌 초부터 1번 타자로 나서 타율 .300을 기록했다. 리그에서 유일한 3할 타자가 되어, 2년 연속 수위 타자와 함께 최우수 훈장 선수 타이틀을 획득했다. 이 해에도 리그 최다 득점 (68득점)을 기록하는 동시에, 도루 2위 (54 도루)를 기록했다. 또한, 이 해 5월 17일부터 9월 18일까지 당시 신기록인 29연속 도루 성공을 기록했다.[10]

2. 3.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44, 1946~1949)

1943년 시즌 종료 후 대만으로 귀환하며 자이언츠를 탈퇴했으나, 1944년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했다. 이 이적에는 현금이 사용되기도 하였다.[26] 1944년 시즌 20경기에 출장, 19도루를 기록하며 고 신교와 함께 도루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1946년에는 투수가 부족했던 팀 사정으로 인해 투수로도 등판, 4월 28일 한큐 브레이브스 전 (한큐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첫 선발승을 완투승으로 장식했다. 같은 해 6월 16일에는 전후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 1946년 팀 내 최다인 14승(6패)과 리그 9위의 방어율 3.02를 기록했고, 타자로서도 타율 0.291(리그 14위)를 기록하며 투타에서 맹활약했다.

1946년 이외에는 투수로 출전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주로 1번 타자로 한신 구단의 주력으로 활약했다.

2. 4. 마이니치 오리온스 시절 (1950~1957)

1949년2리그 분열 소동으로 퍼시픽 리그의 마이니치 오리온스로 이적했다.[26] 1950년에는 2번 타자로 활약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공헌했고, 일본 시리즈 2차전에서는 시리즈 제1호 홈런을 기록했다. 1957년 은퇴할 때까지 20시즌 동안 활약하며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최초로 20시즌을 뛴 선수가 되었다.[26]

3. 은퇴 후

은퇴 후에는 대만과의 무역업, 식품 회사 감사역, 스포츠 클럽 고문 등을 역임했다.[26] 1977년 일본으로 귀화하여 부인의 옛 성을 따라 '이시이 마사유키(石井 昌征)'로 개명했다. 1987년 6월 7일 급성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70세) 1995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특별 표창으로 헌액되었다.

4. 선수로서의 특징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심상 소학교 시절 높이뛰기에서 좋은 기록을 내어 오다 미키오로부터 와세다 대학으로 오지 않겠냐는 권유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운동 신경과 빠른 발을 바탕으로 '인간 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었다.[3][14] 도쿄 자이언츠 시절에는 자이언츠 최초의 동양인 외국인 타자로 '인간 기관차'라고 불렸다.[26] 장타력은 부족했지만, 정교한 타격이 장점이었으며, 때때로 세이프티 번트도 특기였다.[19] 강한 어깨와 뛰어난 컨트롤을 자랑하는 외야수였으며, 2루에서 홈으로 정확하게 송구하여 주자를 아웃시키는 모습은 마치 신의 경지와 같았다고 한다.[20]

5. 일화

'쇼세이'라는 이름은 그의 은인의 아들에게 붙여진 이름이었는데, "저에게도 그 이름을 나누어 붙일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해서 변경한 것이다.[2]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일본 프로 야구전쟁의 영향으로 시즌이 중단되었고, 한신 고시엔 구장그라운드는 고구마밭이 되었지만, 고 쇼세이는 그곳에서 현장 감독(경작 지도원)을 맡았다.[2] 농림학교에서 배운 경험을 살려 토양 개량에도 힘썼다.[2]

종전과 함께 고 쇼세이는 일본어밖에 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적에서 중화민국 국적으로 바뀌었으며, "전승국" 측의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배급에서는 우대를 받기도 했다.[21]

요미우리 시절 친하게 지냈던 히라야마 키쿠지의 집에 초대받아 고에몬 부로에 들어갔는데, 대만 출신인 고 쇼세이는 들어가는 방법을 몰라, 원래 발로 바닥에 가라앉혀야 하는 바닥판을 뚜껑으로 착각해 꺼내서 들어가 버렸다. 당연히 욕조 바닥은 고온 상태였기에 고 쇼세이는 뜨거워서 깜짝 놀랐지만, 이것이 일본식 목욕이라고 생각하고 실례가 되지 않도록 한동안 참았다. 그러던 중, 고 쇼세이는 결국 참을 수 없게 되어, 빠른 발 회전을 활용해 목욕탕 안에서 맹렬한 기세로 계속 달렸고, 다행히 화상은 입지 않았다고 한다.

6. 상세 정보

고 쇼세이는 자이 농림학교 시절 곤도 효타로 감독의 지휘 아래 봄 고시엔에 1회, 여름 고시엔에 3회 출전하여 '맨발의 플레이'로 이름을 알렸다. 당시 외야수와 투수를 겸했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해 야수에 전념했다.

1937년 도쿄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빠른 발과 강한 어깨를 가진 외야수로 활약하며 '''인간 기관차'''라는 별명을 얻었다. 자이언츠 최초의 동양인[26] 외국인 타자였다. 1942년1943년에는 2년 연속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다. 당시 낮은 품질의 공을 사용했기 때문에 타율은 각각 .286과 .300으로 낮았다.

1943년 시즌 종료 후 대만으로 귀환하며 자이언츠를 탈퇴했다. 이후 오사카의 가미시마 화학에 근무하던 중, 가미시마 화학 사장 미야우치 기요시의 소개로 한신으로 이적했다. 이 이적에는 현금이 사용되기도 했다.

1944년 시즌부터 한신에서 뛰며 20경기에 출장, 19도루를 기록하여 고 신교와 함께 도루왕 타이틀을 획득했다.

1946년에는 투수가 부족했던 팀 사정으로 투수로도 등판했다. 같은 해 4월 28일 한큐 브레이브스전에서 첫 선발로 나와 9이닝 1실점으로 프로 첫 승을 완투승으로 장식했다. 6월 16일에는 투수 겸임으로 전후 최초의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같은 해 팀 내 최다인 14승(6패)과 리그 9위의 방어율 3.02를 기록했다. 등판이 없는 날에는 1번·중견수로 나서 타율 0.291(리그 14위)를 기록하는 등 투타에서 맹활약했다.

1946년 이후에는 투수 출전이 거의 없었고, 주로 1번 타자로 한신의 주축 선수로 활약했다.

1949년2리그 분열 소동으로 퍼시픽 리그마이니치 오리온스로 이적해 1957년 은퇴했다. 프로 생활 20년 만에 은퇴했는데, 실제로 20시즌을 치른 것은 고 쇼세이가 최초였다.

1987년 6월 7일 향년 70세로 사망했다. 1995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요미우리와 한신에서 주력 선수로 활약했던 드문 선수였다. 요미우리 대 한신의 OB전에서는 가와카미 데쓰하루, 아오타 노보루후지무라 후미오, 가지오카 다다요시 양 팀으로부터 "너는 여기 선수야"라고 놀림을 받기도 했다.

'쇼세이'라는 이름은 은인의 아들 이름을 따서 "저에게도 그 이름을 나누어 붙일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요청하여 변경한 것이다.

태평양 전쟁 말기인 1945년, 일본 프로 야구는 전쟁으로 시즌이 중단되었다. 한신 고시엔 구장의 그라운드가 감자밭이 되었을 때, 고 쇼세이는 현장 감독(경작 지도원)을 맡았다. 농림학교에서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토양 개량에 힘썼다.

고 쇼세이의 투수 통산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소속팀경기선발완투완봉무4구승리패배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고의사구사구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1940요미우리1000000----307.081203009911.571.43
1946오사카27201620146.700757181.11725652632171613.031.31
194711100101.000379.06021000100.000.89
19481100000----80.250000003227.007.50
19491100001.00091.050100005545.006.00
통산: 5년31231720157.682841199.01966703662189773.481.34


6. 1. 출신 학교

고 쇼세이는 타이난 주립 자이 농림학교를 졸업했다. 가노 야구단에서 선수로 활동하며 1935년과 1936년에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대회에 참가했다. 졸업 후, 도쿄 자이언츠와 계약했다.[1]

6. 2. 수상·타이틀 경력

고 쇼세이는 수위 타자(1942년, 1943년), 도루왕(1944년), 최다 안타(1943년, 당시 연맹 표창은 1994년부터 시작), 최다 출루수(1942년, 1943년) 타이틀을 획득했다.[3] 특히 수위 타자 2년 연속 수상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기록이다.

MVP 1회(1943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1995년), 타이완 야구 명인당 입성(종신 공헌상·경기자 부문: 2018년) 등의 수상 경력도 가지고 있다.[23]

6. 2. 1. 타이틀

연도소속 팀타이틀
1942년도쿄 자이언츠수위 타자, 최다 출루수
1943년도쿄 자이언츠수위 타자, 최다 안타, 최다 출루수
1944년한신군·오사카 타이거스도루왕

6. 2. 2. 수상


  • MVP: 1회(1943년)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1995년)
  • 타이완 야구 명인당 입성(종신 공헌상·경기자 부문: 2018년)[23]

6. 3. 개인 기록

주요 기록



기타 기록


6. 4. 등번호

1946년 ~ 1956년23도쿄 자이언츠
한신군·오사카 타이거스
마이니치 오리온스1957년53마이니치 오리온스


참조

[1] 서적 Colonial Project, National Game: A History of Baseball in Taiwa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11
[2] 웹사이트 https://npb.jp/bis/p[...]
[3] 서적 巨人軍栄光の40年
[4] 뉴스 猛虎人国記(18)~外地~ https://www.sponichi[...] 2013-08-13
[5] 웹사이트 「人間機関車・呉昌征はなぜ“はだしの選手”と言われたのか/プロ野球仰天伝説157」週刊ベースボールONLINE http://column.sp.bas[...]
[6] 뉴스 【6月16日】1946年(昭21) 盗塁王・呉昌征 戦後初のノーヒットノーラン達成 https://web.archive.[...] 2013-08-13
[7] 서적 巨人軍の男たち
[8] 서적 プロ野球助っ人三国志
[9] 문서
[10] 서적 宇佐美徹也の記録 巨人軍65年―栄光の巨人軍65年の歩み
[11] 서적 プロ野球助っ人三国志
[12] 서적 プロ野球助っ人三国志
[13] 뉴스 【ロッテ】育成出身の和田康士朗が初の盗塁王 史上最少「24打席」でタイトル獲得 同僚荻野も盗塁王 https://www.chunichi[...] 2022-09-30
[14] 서적 ジャイアンツ栄光の70年
[15] 서적 プロ野球助っ人三国志
[16] 서적 プロ野球助っ人三国志
[17] 뉴스 〈南部〉《首位日職台將》吳昌征傳奇 子來台尋根 http://news.ltn.com.[...] 2013-04-29
[18] 웹사이트 「KANO」ゆかりの呉昌征氏、王貞治氏に次ぐ2人目の日台野球殿堂入り https://web.archive.[...]
[19] 서적 日本プロ野球 歴代名選手名鑑
[20] 서적 巨人軍の男たち
[21] 서적 プロ野球助っ人三国志
[22] 서적 プロ野球助っ人三国志
[23] 웹사이트 台湾野球殿堂、呉昌征氏らに終身貢献賞 http://japanese.rti.[...]
[24] 웹사이트 1000安打 https://npb.jp/histo[...] 2022-09-30
[25] 웹사이트 KANO公式日本語サイト https://www.facebook[...]
[26] 뉴스 [베이스볼프리즘] 고 쇼세이와 이승엽, '닮고도 다른 길' https://sports.news.[...] MBC 스포츠플러스 2024-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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